프랑스 대표 무신론자로서의 사르트르에 대한 강의가 있다고 해서 참석했습니다. 강의를 하시는 분이나 함께 참석하시는 교수님들은 거의 별과 같은 분들이었습니다. 그것도 대륙의 합리론을 대표하는 프랑스 철학과 독일철학에 정통하신 분들입니다.
특히 사르트르에 대한 강의를 들으러 가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사르트르의 정신적 위치나 기본적인 소개 정도로밖에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 강의들을 소화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그런데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마음에 전에 읽었던 것들 중에서 제가 질문해야 할 것이 생각이 나고 사르트르에 대한 생각이 잘 정리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질문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는 것을 마음에 두고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강의하시는 교수님은 준비하신 강의를 읽으시면서 설명하시는 방식을 취하셨습니다. 마치 하이데거가 강의할 때에도 준비해서 읽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다른 철학의 공통된 모습에 흥미와 기대를 갖고 수강했습니다. 내용은 사르트르의 정치철학 사상이었습니다.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그로서의 사회에 있어서 변증법적 이성의 비판적 입장에 대한 것으로 현실적 실존의 문제를 폭력이라는 것에 직면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으로서 실존의 한계상황에 대한 이해를 하고자 하는 것으로서 사르트르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1부 강의가 끝나고 질문 토론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회보시는 분께서 '오늘은 제가 먼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고 그것으로 토론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사회자께서 부언하신 것과 같이 '신의 부재'라는 것의 전제적인 것이 요청되어지고 실존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좀더 잘 규정되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취지였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사르트르의 타자라고 할 때에 그 대상은 어떤 물 자체적 개념인가 아니면 인간을 말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교수님은 인간이라고 함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결론을 내려 주셨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저의 질문이었습니다. '문학 시간에 철학은 문장 한줄만 읽어도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참 문장 한 줄의 미학을 느낍니다. 사르트르는 또한 말했습니다. '나의 학문은 상상1) 아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질문한 것은 실존과 지금 콜로키움이라는 연속성에서 하이데거를 프랑스에서는 비판을 하고 있는 철학자들이 많은데, 그 내용은 무엇인지, 나치나 그런 것을 말고 듣고 싶습니다'라는 질문을 했습니다.2)
강의하시는 교수님과 사회보시는 교수님들도 흔쾌히 동의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취약점이라는 점을 인정하시면서 사르트르와의 동일성적인 입장을 취하셨습니다. 강의하신 교수님은 사르트르의 그 말 즉 '나의 학문은 상상 아래 있다'는 것이 어디에서 언급되었는지에 대한 것도 간략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3)
이어지는 다른 분의 질문은 심리학에서 말하고 있는 라캉의 상상에 대한 것과 비교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교수님은 다른 점이 있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시고, 또 철학과 학생들도 스피노자의 신관적 개념으로 볼 때에 자연신론적 개념이 판단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과, 마르크스와 유사한 점이 있는가 하는 질문과 또한 레비나스의 구조주의에 대해 읽고 있는 자에게도 참고 말씀도 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르트르의 명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에 대하여서, '나의 학문은 상상 아래 있다'라는 답변으로 신의 부재에 대한 토론과 항방없는 논의는 진척되지 않고 그 논쟁 질문이 기각되었다는 사실입니다.4)
제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제가 질문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으로 생각나게 하시고 할 수 있도록 마음에 준비시키시는 모습에서 사르트르라는 사상의 별이 빛을 잃을 수 있다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서 하늘의 별처럼 떠 있는 무신론으로서의 대륙의 합리론의 자부심이 성립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시간이 아니었는가 하는 것과 그것을 밝힘으로서 강사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신의 부재를 말하는 것의 부당성에 대하여서 깨닫게 하시는 시간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각주1) 상상이라는 인식에 대하여, 1. 사르트르의 학문적 보편성과 합리성의 객관적 근거지음에 대한 기준이 되어진다는 점에서 객관적 근거지음으로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이 그의 상상의 한 표현이라면 한계상황을 맞이하여서 힘쓰게 되는 실존의 납득 당위성을 말해줄 수 있는가라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일 수 있다. 2. 비평에서 기본적으로 이어지는 질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라깡과 같은 상상이나 또는 그와 다른 상상이라는 사르트르의 학문적 규정성을 가진 실체로서의 보편은 그런 한정성을 가진다는 것은 비평적 원리에서 보면 사르트르의 객관적 근거지음으로서의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표현에서 '신의 본질의 부재'라는 말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그보다 보편으로서의 상상에서는 한정된 독단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한계 상황을 맞이한 실존으로서의 인간에게 납득 당위성을 가질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상상이라는 보편에 대하여서 비교할 수 있는가 반문할 수도 있는데, 사실 우리가 상상이라는 것이 어떤 경우에 대한 인식이라는 요소들로 표현되어질 수 있을 때(countable or uncountable)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 자연수의 집합과 연관 시킬 수 있다. 쉽게 표현해서, 자연수의 집합도 무한이지만 유리수의 집합도 무한이다. 그러나 자연수의 집합이 유리수의 집합에 포함되어지는 것처럼 무한이라는 개념도 상호 비교가 가능하다는 것과 이것은 한정적 의미의 판단을 무한이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본인이 집합론적 접근을 하는 것은 우리가 상상한다고 할 때에 그 하나의 개체는 그 있음이라는 것이 셀 수 있는 것이든 그렇지 않든 그 측량되어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 집합론적 판단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무한의 개념도 뒤늦게 나마 철학자들은 연구를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참고 프랑수아즈 모노외르 외, 수학의 무한 철학의 무한, 박수현 해나무, 2008p. 7~8. 각주1)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용한 위책의 무한의 개념은 그런 무한개념이 전에도 있어왔고 또 그런 접근의 가능성을 말할 수 있다는 점이며 그런 점에서도 상상이라는 보편이 한정적 판단의 범주에서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본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철학에서 말하는 상대적 절대 보편이라는 개념과는 달리 하나님 자존의 절대 보편은 즉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그런 보편의 상대적 범주로 표현되기도 하고 인식된다고 하여서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비로소 판단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본래성은 상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그 실체적 당위성을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각주2) 사실 이 질문은 아주 실례가 되어질 수 있다. 같은 게르만족의 후손이면서도, 같은 대륙의 합리론의 범주이라도 독일의 합리주의와 프랑스의 합리적 노선과 입장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에 비교한다는 것은 지적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질문해서는 안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강의하시는 교수님의 입장에서 폭력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과 다르게 이해되어지고 건설적인 개념의 폭력도 존재 가능하다는 언어적 사상을 말하고 있음을 기억할 때에, 비록 여기가 프랑스가 아니면서도 받으실 것으로 생각하고 질문하였다. 교수님은 담담히 받아주시고 내용은 배척보다는 비판적 수용이라는 사회보시는 분과의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해 주셨다.
각주3) 물론 교수님께서 답변하실 수 없으셨던 것은 아니시겠지만, 시간상, 또 여러 자유토론을 잇기는 무리인 여러 정황 탓도 있었지만 한 줄의 논쟁 재의에 한 줄의 언급에 대한 답변의 당위성을 인정할 수 있는 지적 합리성에 대해 열려있는 자세와 도그마적인 개념에 대한 유년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 상당히 정직하심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앞서 각주1)에서 나의 입장을 밝혔다. 상상이라는 한 보편적 개체뿐만 아니라 어떤 철학의 변형에서 보편을 상정한다고 해도 인간 실존의 납득 당위성의 본래성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이다.
각주4) 앞서 대륙의 합리성의 큰 별들 하이데거 헤겔 등과 그의 위성들로서의 별들로서 손색이 없는 교수님들의 입장 즉 실존이라는 개념으로서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는 말로 뭇별 위에 위에 뛰어나고자 하지만 다니엘에게 말씀한 바와 같이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리라'(단 12:3) 라고 하심과 같이 그 빛남에 비교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다니엘 그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인데,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존적 정당함을 얻은 자들의 빛남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존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 뜻함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상상의 신의 본질에 앞서는 실존이라는 개념에서 신을 부정하는 상상을 하지만 그 객관적 근거지음의 정당성 더 나아가 납득 당위성은 한정적인 독트린(the Doctrine, which is not allowed)으로 인간 실존의 받을 바가 아니며 자존의 하나님의 핑계치 못하는 복음에 핑계거리가 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기만적 개념으로 나타날 수 있기에 빛을 잃어 떨어지는 별임을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