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아픔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인식적 발상과 방향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홀로코스트라든지 세계 대전과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예와는 비교가 안된다고 말하는 자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자녀들이었다는 측면에서는 그런 말과 표현에 불편을 표현할 수도 있는 우리 정서가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일반적 정서라는 것에 있어서, 바람직하지 않는 사상적 변화가 또는 왜곡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글을 쓰고자 합니다. 구체적 언급을 한다면 '이단에 대한 연민과 이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자들이 이단으로서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한 행보를 하다가 들통이 나게 되는 경우는 여러번 있어 왔고 진리를 왜곡시키는 자들이 기독교 전체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자본을 축척하는 것이 죄를 쌓는 것이라는 중세적 개념에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와 차별하는 경향으로 나갈 수도 있는 입장입니다. 얼마전 현 교황의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표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의식해서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단이라는 개념도 역사적으로 집단 이기적인 발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고 이것은 이단들의 변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단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임을 말함에 있어서, 성경을 달리 해석할 수 있다는 것으로서 성경적이지 않다는 판단에는 마음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단 연민이란 말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구원파,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여호와 증인들, 그외 통일교 등 이런 사람들의 합리성을 다루는 것이 별로 마음에 둘 만한 것이 아니기에 그냥 넘어 왔습니다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라고 말하라고 할 때, 말하지 못합니다.
다만 성경에서 합리성을 찾을 수 있으면 그렇지 않느냐는 개념의 합리적 당위성만 세울 뿐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았느냐는 개념에서 그 확실성을 찾을 수 없다는 것에서 자기들의 합리성으로 답할 수 있는 것 같이 기만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가운데서의 구별적 합리성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는 개념 없이 그것이 되겠습니까, 신천지는 어떤 이를 교주로 말하고 있고, 하나님 개념이 전혀 없는 것이지요 그냥 '하나님' 그 하나님이 범재신론적 개념인지, 범신적 개념인지, 만들어진 하나님인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말해주지도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이라는 말만 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 하나님의 교회, 여기도 어떤 인간을 신격화 한다면서 말하고 있고, 여호와의 증인, 성경에 나타난 좋은 언어를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부정하는 소망없는 사람들 ...
종교개혁 시대의 인식을 살펴서 언급한 롤란드 베인톤은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책을 통해 그 때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 상식보편적 개념에서 이루어진 면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상식적으로도 가톨릭적 개념은 받을 수 없었던 것이라는 점을 말하였고 그것에서 현대에 이루어지는 개념에서는 상식보편철학이 프린스톤 신학에 들어와 좌경화 되었다는 말도 재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후에 우리나라에서 그곳에서 공부하신 분들의 영향력이 우리나라에 좌경적 개념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이러한 정황들을 살펴보변 상식보편적 개념으로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성경에 따른 삶만을 강조하는 가운데서 성경적 합리성만 갖춘다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이용하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지요 그것이 이단들의 열심의 배경과 전부인 것입니다.
아 물론, 베인톤 박사가 말한 것과 같이 16세기 정황에서의 인식이 상식적 보편 생각을 했다고 하는 것이 종교개혁 전부가 그렇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실재와 실제의식을 가진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의 단적인 예로 가톨릭의 면죄부 사건에 대한 그 도적적 개념에 반대한 것이 종교개혁의 실제가 아니라 그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에서 잘못되었다는 것, 하나님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였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교리적 잘못이라는 것을 여러 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에 저도 동감하면서 가톨릭은 성경의 지지도 상식적 지지도 받을 수 없었다는 것과 지금은 상식적 지지는 회복할 수도 있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성경적 지지 특히 하나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중심은 가지지 못한 것으로서 여전히 이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 여러 교리들에 대한 비판도 있을 수 있고, 특히 로레인 뵈트너 박사의 가톨릭 사상 평가라는 개념은 전반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저자는 후천년적 개념을 언급하는 경우이어서 무천년적 개념에서는 입장이 다르기는 하지만 구별하여 받을 수 있는 판단으로 전반적 인식을 갖출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위 저자와 함께 한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중보자 예수님께 더 잘 나갈 수 있도록 마리아에게 기도한다는 발상은 중보의 개념과 독생자의 뜻하심에 위배 되는 것입니다.
어떤 가톨릭 상식 사전에서는 영세를 받는 가운데 꼭 성인들과 관계를 맺어주고 그를 의지하여서 주님께 나가도록 하고 있는데, 역시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중보자의 개념이 예수님 밖에 없다는 개념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이성들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형성 과정에 있는 종교를 쓴 화이트헤드와 같은 자들과 과정 신학을 말하는 자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이해한 카빌라적 유대적 전통을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미완료되어진 이름의 뜻으로 해석하여서 과정이라는 실존을 이해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해석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납득의 당위성을 비로소 가지지 못하는 해석들 중의 하나라고 하는 것과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해석적 당위성에서 재해석되어야 하는 가운데서 구별이 필요한 것의 하나인데, 분별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도 종교적 개념의 순종적 개념을 그들의 통치적 개념으로 이용하고 있고, 히틀러도 그런 중심을 가지고 교활하게 독일교회에 분열을 이용하고 주도했던 것들을 보며, 이번 사건의 이단들의 개념도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증거라고 하는 것을 임의적으로 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마음에 둘 수 없다면 이런 종교적 시스템은 이용 가능한 것이라는 개념밖에는 다른 판단이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얼마나 하나님의 이름에 무관심하고 망령되이 일컽는 것에 분별력이 없는지, 이 시대의 지혜는 이런 것이 결여되어져서 진정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판치는 시대에 대해서는 미가가 말한 것을 마음에 둠이 옳은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지니라"(미 6:7)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가 예비되었나니 그것을 정한 이가 누구인지
들을지니라"(미 6:7)
상식적으로 보편적 입장을 취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입장에 대하여서 마음을 두지 않는 모습에서 지금의 여러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때에, 가톨릭은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해, 기독교에 대하여서 비판적 당연성을 주장할 것이고,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런 이단들의 모습이 기독교의 모습인 것과 같이 착각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생각들과 판단은 왜곡되었음을 지적해 둡니다.
앞서 말한 여러 아픔을 초래하는 사건들이 있을 때에, 그 판단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점이 될 수 있는데, 일부 합리성의 훈련이 되지 않은 가운데서는 또다른 잘못된 왜곡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합리성으로서 성경의 재가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서 판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과 중심을 가지지 못하고, 맹목적인 하나님이라는 개념만 띠워놓고 성경의 합리성만 찾아내는 자들, 합리성에서 비로소 신앙의 정통성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 합리성이라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재가의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맹목적인 하나님, 개념만 띠워놓은 상태에서는 진정 하나님과 상관없는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면서 주여 주여 주님을 부르는 것과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른다고 하심은 납득되어질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이단들에 대한 연민인 것입니다.
기독교와 이단들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서도 잘 이해를 하시고 형제들에게도 위로하고 섬기면서 바른 판단을 하는 가운데서 새롭게 아품을 이겨내고 믿음의 선한 길을 모두 잘 달려가시기를 바라며, 예수그리스도 주님, 부활하셔서 자신의 실존을 스스로 주관하시는 주님으로서 자존의 하나님 성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주 성령님의 위로로 인해 새 힘을 얻으시며 참된 지혜로 하나님의 받으신 바 되시는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참고글
1. 하나님의 이름을 실제적 기준으로 삶을 비로소 하지 않았다고 해서 바로 이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합리성 앞에 진실로 하나님의 실재를 믿었다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적 판단이 시작되어지는 가운데서는 앞서 말한 기준을 두지 않고는 합리성의 당위성을 세우지 못하고 이단적 개념으로 흐르기 쉬운 것입니다.
2. 속된 표현으로 생각없이 세상을 살 수 없는 가운데서 지혜가 필요함은 어릴 때부터 갖추어야 하는 것과 같이 지금 주의 뜻하심을 바라볼 때에 판단없이 믿음이 중요하면서도 그것만의 지속성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이성과 감성과 영성이 하나로 나타나는 것도 당연한 것인데, 현실적 상황에서는 분리에 익숙하고 역사적 개념에서 인식 순서적 개념을 의식할 때는 이런 분리적 개념 어떤 것이 우선순위를 두느냐는 식의 인식이 지혜처럼 말하고 있는 수행적 모순을 봅니다만, 이것도 구별할 때에, 동연적이라는 표현이 옳은 것임에도, 꼭 지혜를 위해 갖추어야 할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입장이라고 함을 말해둡니다.
4. 아. 더우기 학생들의 입장에서나 철학자들의 이성적 입장에서는 칸트의 영향력을 의식헤서 순수이성이라는 프리아포리적 개념이 의식되어질 수 있는데, 존 프레임이 쓴 조직신학에서는 출3장에서 신론적 특성을 읽을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모세의 부르심에서 이 영적 이성적 경건 모두가 하나되어 나타나고 있고 시간의 판단의 앞선 것이 그것이라면 우리가 꼭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