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화’ 되어져감을 의식하게 되는 ‘소셜 미디어’(The social media)나 또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The social network service)1)와 같은 것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더 의식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삶이 되었다. 지역에 따라서, 어쩌면 불특정 지역에 따라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것을 의식함에 있어서 일반 사회에서의 경우2)와 어떤 특정이라는 표현보다는 우리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달리 마음에 두어야 할, 신앙의 옳고 그름이라는 것이 지적될 수 있는, 신앙의 유의점이 있다는 점을 재고하여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중세의 ‘화상예배’와 ‘sns'의 비교되어지는 가운데 분별을 요하기 때문이다.
중세의 화상예배와 다른 점은 그 화상 자체에 어떤 ‘신비적 가르침을 직접 느낄 수 있다는 점’이 그 중재적 개념으로서 문제가 되었지만, sns는 그 이미지 자체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전달적인 그 내용’으로서, 인격적 가르침에 대한 간접적 ‘정보성의 실재적 실제의 유익’을 공부와 교제에서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예배의 차원에서는 중재적 개념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 간과될 수 없는 비교점으로 지적되어질 수 있다.
중세의 있었던 화상에 대한 중세 교회의 ‘경외’ ‘숭상’, ‘흠숭’의 개념이 받을 수 없는 잘못이었던 것처럼3), sns도 역시 화상적 개념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직접중재로서의 예배를 주관하게 하는 것은 잘못이며 죄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4) 그 화상이라는 개념이 ‘하나님께 우리 인격적인 하나님께 드림’ 또는 ‘하나님께 나아감’을 중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5)
‘sns로 예배를 드린다’는 표현은 옳은 표현이 아니다.6) 그런 가운데서 어떻게 예배에 사용하고 교제에 활용되어질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재고되어야 한다7)
글을 맺으면서,
‘sns’(the social network service)는 공예배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목회적 돌봄에 있어서는 잘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로는 예배당 공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은 소그룹 활동이나 가정예배 등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공예배를 다시 드릴 있도록 사모하며, 그런 간접적인 것을 잘 활용하여 목회적 돌봄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하며, 하나님께 신성의 담지자로서의 인격적 드림으로서의 올바른 예배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었으면 한다.
각주 1) 이하 ‘sns’로 표기함
각주 2) 사회적으로 좋은 점은 관계성에 대한 것과 정보제공에 대한 것을 말할 수 있고 나쁜 점이라고 하는 것은 비방과 거짓이라는 점이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점을 상식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어보인다.
각주 3) 기독교 강요(1559), 1권 11장 4절 ‘4. 우상과 화상은 성경에 위배된다.’
화상은 어떤 책이라고 하는 변명이 있지만, 칼빈은 그것에 대하여서 반론하고 있다.(기독교 강요 1권 11장 5절, 각주 11,[존 칼빈, 영한 기독교 강요, I 편집부 성문출판사 1993, p. 201]) 그것은 중재적 개념으로서의 주체적 입장으로 나타남을 의식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문자와 같이 그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강요(1559), 1권 11장 10절
“이러한 일이 오늘날까지도 행해지고 있으며 우리의 기억 속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은 얼마나 파렴치한 자들인가? 그들은 왜 형상들 앞에 엎드리는가? 또 기도할 때 그들은 왜 하나님 귀에 대고 들으라고 하듯 우상을 향하는가? 어거스틴이 형상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거나 또는 예배하는 자 치고 우상이 자기와 기도를 듣는다고 생각하고 또 그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 준다고 소망을 갖지 않는 자는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사실이다.(Augustine, 『Psalms』, 시 113. ii. 4~6.)”(상게서 p. 212.)
각주 4) 쉽게 표현해서, 비디오를 보면서 그 비디오에 맞추어서 찬송도 부르고 설교도 듣고 하는 예배 행위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배가 아닌 것이다. 예배 행위가 아닌 공부나 또는 배우는 행위는 가능하지만 말이다.
각주 5) sns를 통한 이미지의 인도를 따라, ‘녹화든, 실시간이든’ 그 ‘이미지 영상’의 인도를 따라서 행한다면 비록, 그 이미지의 내용에 마음을 둔다고 하여도 ‘이미지’의 지도를 따르는 가운데서 예배 행위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미지는 예배의 주체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비인격의 주체로 예배를 주관하게 한다면, 인격적 주체를 통해서 지도하시는 하나님의 신성의 행보에, 다른 소위 ‘이물질’로 대체되는 것으로서 신성모독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명백한 우상숭배 행각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인공지능에 따른, 인격적인 설교자가 없이, 음성파일이 그를 대체되는 예배(?) 행각이 있을 수도 있다면 이런 것들도 현대판 우상숭배라는 죄악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각주 6) 이 언급에 대한 근거를 해체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예배 인도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신성에 대한 감각이 있다(칼빈도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기독교 강요 1권 11장 4절 “..이로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신성(神性)에 대한 하나의 감각이 새겨져 있다는 지금까지의 주장이 더 확실해진다.”(상게서 p. 94.)) 그렇기 때문에 화상이라는 ‘이미지’, 신성의 감각이 있는 인간의 이미지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신성의 감각을 담지하지 못한다. sns는 예배인도의 주체로서의 실재(實在), 실제(實際)할 수 없다. 따라서 ‘sns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옳은 일도 아니며, 오히려 어리석은 상을 숭배하는 행위로 죄라고 함이 옳다.
그러나, sns을 사용할 경우, 예배행위를 할 수는 없지만, 허용될 수 있는 것은 인격적 예배에 도움적 차원에서는 활용할 수는 있어 보인다. 즉 예배 인도자로서 설교자가 직접 보일 수 있는데 좀 멀다고 하든지, 전달 메시지를 전함에 설교에 사용되어질 수 있는 인격적 모습들을 좀더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가능하고 또 추천되어질 수도 있다.
각주 7) 설교의 내용을 듣고 공부할 수 있고 찬송가도 듣고 배울 수 있고 여러 공부할 주제와 내용들을 통해 학습할 수 있다. 또 인도자가 인격적으로 예배를 인도하는데 도움으로써 활용할 수 있다. 우리는 교인 전체가 ‘sns’를 사용하여 하나로 예배드린다는 환상적 개념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얼마든지 소그룹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고 또한 그 예배에 대한 내용들도 예배 전후에 sns로 나눔과 전체적인 통일성 있는 신앙의 중심을 가지고 협력하고 교제하고 ‘목회적 돌봄’을 실천할 수 있고, 그렇게 함을 옳게 받음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