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떼 교회, 2021년 11월 14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출 8:16~19
셋째 재앙 – 티끌이 이가 되다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라는 자의 작품 중에 ‘절규’(Skrik; The Scream)라는 그림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울함과 지옥에 대한 공포 등 여러 감정에 따른 표현을 하고 있는데, 사실 뭉크 자신의 실제적 경험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작품에 덧붙여진 글이 있습니다.
“두 친구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 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처럼 붉어졌고 나는 한줄기 우울을 느꼈다...(이하 생략)”
그 작품은 오슬로 뭉크 미술관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애굽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을 살펴보는 가운데 오늘은 셋째 재앙 티끌이 이가 되는 재앙에 대해 비교되어져 보입니다. 좀더 살펴보며 말씀을 증거합니다.
앞서 언급한 뭉크의 실제적 의식에서 그린 절규의 모습과, 오늘 본문인, 이집트에 거주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사람들이 이 셋째 재앙을 받게 될 때 그 ‘절규’라고 하는 것이 비교 된다고 하겠습니다.
다른 점을 분명히 말한다면, 뭉크는 단지 절규에 그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는 가운데서 주의 구원을 이루시는 열심을 나타내심을 봅니다.
본문 말씀은
16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론에게 명령하여 지팡이를 들어 땅에 티끌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애굽 온 땅에 이가 되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들이 그대로 행할새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사람과 가축에 오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8절과 19절 말씀에서는 요술사들도 그렇게 행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고, 바로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하였으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었는데, 이는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 티끌을 치라
2. 하나님의 권능이라
이 두 소주제로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1. 티끌을 치라
주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론이 티끌을 쳤을 때에, 그 때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중심이 어떠했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아마 ‘절규’라는 그런 표현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연상이 됩니다. ‘먼지가 피어오르면서 그 먼지가 이로 변하여 사람들에게 가축들에게 오르는 장면’, 또는 ‘먼지가 없이 그냥 툭 쳤는데, 갑자기 티끌들이 이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듯한 기어오름이 있을 때에 비명이 있을 수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물이 피로 변해서 마시지 못하고 나일 강 주변을 파며 고생고생하며 지냈다가 또 개구리로 인해 놀라고 괴로운 심정에 이제는 티끌이 이로 변해 덤벼드는, ’러쉬하는‘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할 때에, 그들의 마음은 하나의 ’멜랑꼴리(melancholy)‘와 같은 우울함을 앞서 절규가 있었을 것입니다.
피를 보고 자기와 함께한 자들의 티끌로 인한 이의 공격을 받는 것을 보는 자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재앙을 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권능이라
요술사들은 자기들의 요술로 그같이 행하지 못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바로에게 말했고, 바로는 우울한 가운데서도 냉철함을 잃지 않고 여러 가지 계산적인 입장에서 완악함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그렇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는 은혜를 입지 못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무작정 따라한다는 것은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요긴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 학습과 또는 일을 진척시킴에 중요한 한 방법과 기술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요술사 그들은 그것의 행할 수 없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함을 인정하였지만, 그들의 중심과 다르게 역시 하나님의 권능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왜, 그런 티끌로 이가 되는 재앙을 내리셨을까 하는 것을 주목할 때에 눈을 뜨게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들의 회개를 가르치시고 기억하게 하시는 것으로서 그 권능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능으로서 ’하나님의 권능‘인 것입니다.
이 티끌과 회개에 관한 것은 욥기서(욥 30:19; 욥 42:6)와 에스겔서(겔 24:7; 겔 27:30) 그리고 다니엘서(단 12:2)에서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욥의 경우는 고통과 회개를 말씀하시는 부분이고, 에스겔서의 경우는 두로의 심판받음에서 그들이 고통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다니엘서의 경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2~4)
다니엘서의 2절과 3절까지의 말씀은, 오늘 본문의 애굽에 내리신 티끌이 이가 되어 주의 구원의 백성, 이스라엘의 깨어남을 의도하심과, 그렇지 못하고 두로의 사람들의 고통에 비교되어지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들로서의 받는 고통와 심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4절까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해지는 가운데서 이미 주님 안에서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성도들과 세상에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올 자들이 이미 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로서의 삶을 살면서 아주 사소해 보이면서도 죄로 인해 송사되는 여러 가지 책망 받을 것들이 있을 때에는 그 가운데서 욥과 같이 회개하는 자리에 서기 원합니다. 너무나 일상적인 것으로 되어버린 많은 죄들이 우리의 삶에 죄 가운데서 사로잡을 지라도 우리를 용서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서 구원의 자리에 서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햐여 승리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단 12:2)입니다.
우리의 심령에서 송사하는 많은 죄에 대하여서 냉철하게 그 우울한 가운데서 천재성을 발휘하는 듯이 보이는 ‘바로와 같은’, 슬픈 수치의 자리에 서는 자가 되지 말고, 회개하며 깨어나, 예수님의 대속하심의 권능으로 주시는 은혜로 영생을 받는 자리에 서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한양떼 교회와 우리 성도들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