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4일 일요일

개혁교회는 '여호와증인'이라고 하는 이단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는가..

개혁(Reform)이라고 하는 말을 어떻게 한정시키며 규정하여 말하는가 그리고 그 실제를 말할 수 있는가 그러한 측면에서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들이 여러가지로 나타날 수 있고 그렇다는 것은 비판적 여지가 있고 개인적인 판단을 한다고 하여도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 안에서 용납되어질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은 작금의 기독교의 여러 종파를 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에서 구교측을 비롯한 현대주의적 개신교 내에서도 기독교의 정체성에 대한 비판과 자성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잘못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믿음의 분량이라고 함의 차이와 그에 따른 하나님 앞에서의 선한 중심과 신앙의 고백이 있게 되어지는 것이 사실이면서도 그 믿음의 분량이라는 개념으로 규정되어질 수 없는 자리에 서는 자들도 있다는 점에서 이단에 대한 언급과 규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단에 대한 평가를 하게 되어지는데 그 기준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것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그 이단이라고 함의 판단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라고 함을 말하게 됩니다.

그러한 중에서도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한 특정단체가 이단임에 대한 것을 말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삼위에 대한 부인뿐만 아니라 주의 기도를 이루는 성도들로써 가장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망령되어진 이단단체라고 함을 지적할 수 있고 또한 지적되어야 함의 당위성이 너무나 분명하게 실제적으로 성립되어짐에 글을 쓰게 됩니다.

1. 본론에 앞서 신학사조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서..

신학이라는 특정학문과 사상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이 문학과 지성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흐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특정 학문과 또한 신앙으로써의 그 증거적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흐름과 유럽과 기타 작은 나라들의 신학사조들도 역시 미국으로 흘러드러옴에 대한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프린스톤신학에서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게할더스보스의 사상아래서 존머리와 코렐리우슨 반틸, 메이쳔과 같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고, 또 우리 한국의 신학적 사상이라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그러한 보수주의 신학들의 거장들도 역시 프린스톤의 게할더스보스의 사상적 영향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적었음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수가 인정하는 것과 같이 사실화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 자체라고 하는 보스의 사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단지 다소 그의 합리성만 빌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사상적 입장을 취하였고 오히려 카이퍼와 같은 자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 사조로써의 '도래안티'라는 그러한 사상들과 청교도적인 입장에서의 종교개혁적인 신학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한국의 신학적 정체성을 가져온 것입니다.

청교도와 개혁신학이라고 하는 것의 차이점이라고 하는 것과 그 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여기서 참고하는 것보다는 그 차이점으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의 복음의 실재를 말한다는 것, 자존의 하나님, 자충족적인 하나님에 대한 증거라고 하는 것이 개혁신학의 기본적인 실재론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에서 다음의 논제로 넘어가고자 합니다.

2.'여호와 증인'의 거짓됨에 대하여서..

개혁신학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여러가지 믿음의 분량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열려있다고 하여도 여호와증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과 같이 행동하는 기만적인 행동과 그 정체성을 비판함에 있어서는 당연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번째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에 대하여서 먼저 분별하고 그 분명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증거가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는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하면서 삼위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심에 대한 증거의 실재를 그의 이름으로부터 실재적 정당함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아리안주의자들과 같이 피조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상대적인 표현을 통해서도 자신의 절대 정당함에 따른 실제를 부여하시는 가운데서 예수님은 상대적 판단의 합리성의 결과를 따르지 않고 절대자 자신의 재가에 따른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하여야 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자가 상대적으로 말함과 나타내심이라고 할 때에 그 자체적 정당함은 자존하시기 때문에 상대적이라는 그러한 보편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개혁교회의 삼위일체의 정체성과 실재론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를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합리적 모순의 판단을 의지하여서 삼위하나님에 대한 것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의지 하지 않는 기만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삼위하나님을 부인하면 그것은 이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이와 같은 견해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러한 단체는 자기 기만적 정체성을 가진 자들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만드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판단하에 그들의 실존이 있다는 것을 말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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