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대한 논쟁점은 무엇인가..-코넬리우스 반틸 박사의 견해 소개-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논쟁점이라고 하는 것을 합리성 그 자체에서 찾게 됩니다. 그것은 합리성에 따른 설득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납득 정당함에 대한 비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이성적 합리성이 자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보편이라고 하는 상대적 보편이라는 것의 지지위에서 자기 정당함을 추구하는 것인데 이것은 현대의 철학의 방향성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20세기의 볼테르라고 불리우는 불가지론자 버트란트 러셀도 그의 서양철학후반에서 합리성의 보편추구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음도 하나의 근거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적 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의 보편을 판단하는 그러한 실재를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을 반틸 박사는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넬리우스 반틸에 대하여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음은 피상적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그의 스승 게할더스보스의 사상을 현대의 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과 그의 사상을 그대로 받은 반틸의 입장도 피상적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반틸의 주장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구별이라고 하는 것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며 이것은 현대의 불가지론의 한 표현인 것같이 오해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께서 상대적으로 표현할 때에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그 실재를 규정하시는 것과 그러한 실재에 따라 규정되어진 실제 즉 객관적 존재로써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짐을 말하고 있는 불가해성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러한 오해의 이유는 불가해성과 불가지론의 유사적인 개념과 불가지론에서 파생되어지는 가지론이라고 하는 것이 신학적 불가해성에 대한 것과 동일시 되어지는 것과 같이 철학자들의 정직하지 못한 인식과 발상과 표현에 따른 것임을 또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의 논쟁점은 그 하나님에 대한 증거의 실제적인 사실인가.. 아니면 허구인가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그 하나님 자존의 절대의 정당함 속에서 그 실재를 분별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사실로써 진리로써 증거되어짐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의 증거와 받지 못하는 자들의 반증시도에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코넬리우스 반틸 박사의 '종교심리학' 중 본문 인용..
우리의 주장은 심리학과 형이상학 사이에 있는 가공적인 분리가 만들어지지 않는 경우에만, 경험이 공정하게 다루어지고 또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만이 전체로서의 실재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기 때문에 올바르게 경험을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의 적대자와 더불어, 우리가 최선의 실재해석을 갖고 있는지의 문제를 기꺼이 논의하고 있으며 또 심지어 논의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 심리학자들이 우리를 처리하려고 하는 방식대로 우리를 처리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그들은 단순히 그들과 똑같은 결론에 이르지 않는 모든 사람이, 심지어 경험에 충실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그들은 우선 경험이란 말의 의미를 제한시켰으며,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그 곳에 내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의상 배제시킨다. 즉 그들은 우리가 자연인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해석과 결합시킬 수 없는 것은 모두 배제한다. 그들은 자연인을 진정한 종교 경험의 인정 기준으로 삼는다.
정확히 여기서 논쟁점이 있게 된다. 우리는 자연인이 참된 종교경험과 거짓된 종교 경험에 대한 좋은 재판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주장은 자연인 자신이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만약 자연인을 재판관으로 세운다면 곧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위해 아주 좋은 변명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만약 자연인을 재판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겨진다면, 가장 극단적이고 이상 야릇한 것으로 주어질 수 있는 증거로부터 배제된 좋은 근거란 하나도 없다. 그러면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말할 의미가 완전히 없게 된다. 한 사람은 신을 숭배하고 다른 사람은 악마를 숭배하고 또 다른 사람은 일월성신을 숭배하고 그 밖에의 사람은 자신을 숭배하게 된다. 따라서 숭배행위 자체는 기껏해야 조사할 가치가 없는 완전히 특색이 없는 것이 된다.
(코넬리우스 반틸 종교심리학 위거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