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금서'라는 개념은 사실 요즘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란 언급을 한다면 아마도 시대착오적인 개념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 요청될 것으로 본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것이 어떤 사상의 정립에 있어서 '유익'이라는 개념의 주관적 해석에 따라 사상의 롤 모델이라고 것으로써 마음에 두고 행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한 것의 한 예를 들 수 있는 것이 영지주의적 입장에서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는 유다복음(The Gospel of Judas)(각주1)이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그 합목적적 입장이 반 기독교적 개념이나 또는 '이단'들의 자기 합리화적 개념으로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곡해와 자기 기만적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있어서 소위 유다복음 읽기를 어떻게 하는 것이 옳으며, 또한 우리가 받을 만한 것인가에 대하여 언급하도록 하겠다.
유다복음의 주장에 대하여
먼저 번역자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입장에서 몇 가지 비판적으로 읽기를 시도할 것이다.(각주2)
첫째로, '유다의 배신과 도움에 대하여서'(각주3), 이 주제는 영지주의적 배경과 실재론에서 언급되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의 요청에 따라 배신하는 형식을 갖추었고, 또 그것은 예수님이 본향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영지주의적 개념에서 언급되어지지만 성경에서의 예수의 자기계시로서는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의 자기 계시는 성경 본문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그 실존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의 자기 실존을 가룟 유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실 수 없는 분으로 비추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대한 증거와 전혀 상관이 없으며 정당한 인식으로서의 실재와 실제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영지적(gnostic)이 용어는 고대로 부터 오늘날까지 논란' (각주4), 여기서는 고귀한 지식이 비로소 구원 즉 신의 합일되는 신플라톤적 개념의 일자로 언급되는 존재로의 회귀를 말한다고 할 때, 신론적 개념의 문제점을 의식 할 수 있다는 것이다.(각주5)
여기서 논란이라는 개념은 기득권을 가진 것으로 해석이 될 수도 있는 정통 교회 측의 입장에 상대적 여지는 남아 있다는 것으로 그 당연성을 부풀려 부인함에 대한 부당성을 알리고 소위 정통 신학이라는 것에 안티적 개념의 성공적 사실을 말하고 싶어할 수도 있고 다원적 개념성에서 자신들의 집단적 세력의 당위성을 비로소는 아니라고 해도 언급할 수 있음에 희망을 가져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신학의 집단적 이기주의의 승리적 입장을 옹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실제를 가리는 가운데서 그 지혜를 말할 때, 영지주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한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 성부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으로서 당연히 배척받고 그 실존적 당위성이 부인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셋째, 셋파(Sethians)로서의 자부심(각주6), 이는 창세기에 나타나는 셋의 자손의 지식을 가졌다고 하나, 그 셋의 하나님은 그런 신플라톤적 철학의 만들어진 신이 아니고 그 안에서 합리성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모조신(god made)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가졌다고 하는 지식도 인식 납득이나 신적 재가가 없는 합리성의 조작품에 지나지 않는 화려한 공작일 뿐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의 계보가 셋을 통해서 나타나기를 기뻐하실 때에, 그러한 지식과 지혜도 주시지만 피안적 사변의 거짓 합리성과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 신론적 입장이 다른데, 무슨 지식의 실존을 말하고 그에 따른 나름대로의 구약 성도의 자부심을 말할 수 있는지, 전혀 정신적 트라우마(trauma)가 염병으로 확산되는 것이 역겹다는 판단을 지울 수가 없다.
넷째, 보르헤스의 언급(각주7),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개념을 의식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인식에 있어서 피해의식의 소송적 개념을 정적인 방법으로 당연시 하고 싶은 소망을 피력할 뿐인 것이다.
다섯째, '대신해 죽은 구원자가 아니라 지혜와 지식을 가르치고 드러내는 스승'(각주8),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님을 임의적 자의적으로 존재 규정한 내용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영지주의자들의 변할 수 없는 입장인데, 또한 영지주의적 입장이 성경적일 수 없다는 것과 예수님의 재가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거짓 실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것은 알버트 슈바이처의 신학 이후에 예수님을 임의적 묘사하는 것이 하나의 인식의 잘못된 전통이 되었는데, (각주9) 그런 전통의 한 지류로서 영지주의도 언급되어질 수 있으며 이것은 이러한 인식의 전통이 예수님을 증거함에 있어서 그 정당성의 실존과 실체와 실제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 주장은 거짓이라는 사실적 당위성을 빗겨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은, 예수님의 자신의 존재는 스스로 주장하신다는,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성부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나타내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정당함과 본래성 절대성 등 모든 속성을 위격과 같은 형태로 스스로 갖추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가룟유다의 도움없이는 그 사역을 수행못할 것이라는 상대적 모순이 하나님의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이입한다는 것은 용서 받지 못할 죄인 것이다. 인생이 아니신 하나님이 자기 계시로서 참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은 상대적 합리성으로는 재가 받을 수 있는 또는 납득 당위성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합리성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 어리석은 지식인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 '저자들의 바램'(각주10), 번역가들의 바램은 액면적으로 건설적인 합리성의 모습을 갖추면서도 안티적 합목적성이란 것을 굳이 감추지 않거나 그것을 읽어내기를 바라는 측면에서는 또한 교회에 대한 안티적 자신 있어하는 도전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
이러한 번역가들의 자신감에는 신론의 형성에 대한 비판적 배경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각주 11) 더욱 초대 교회는 '하나님은 누구신가'가 문제가 처음 대두되었데(각주 12), 아마도 영지주의적 입장에서는 수정된 신플라톤주의적 유신론 입장과 개념학적 입장의 신학적 논쟁이 있었음을 그리고 그 지파의 신학적 전통을 의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각주 13)
그러나 초대교회가 '여호와는 하나님은 한분이시다'(신 6:3)라는 것에 힘쓰게 되었고 그 가운데서 비록 수정플라톤주의자들과 어거스틴의 대립적 입장을 볼 수 있어도 유일신을 증거하는 가운데 합당함의 전통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대상 16:29; 시 29:2; 시 96:8; 행 5:41 참조)이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의 속성을 그 상관성으로 이해하는 전통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자들(각주 14)보다는, 차라리 개념론자들의 입장을 수정하여 받을 수 있음을 정당하게 구별할 수 있을 때, 즉, 지금의 정통 신학의 계보가 구별되어질 수 있음을 기억할 때, 그 허식의 가면을 벗어야 할 것이다.
결론에 즈음해서
유다복음 읽기, 그 이해되어질 수 있는 배경에 대하여서 생각해보며 신학적 계보에 대한 성찰을 해 볼 때, 그것은 정경으로서의 실존을 말할 수 없고, 예수님을 달리 표현한다는 다양성을 말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거짓 예수를 참된 예수님으로 속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유다복음과 그 외 유사 영지주의, 또는 다른 외경이나 위경까지도 그만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의 정당함을 얻지 못한다면 여전히 안티 기독교적 개념의 실존으로 매력있게 보일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거짓이요 자기 기만이라는 것에서 회개가 아닌 다른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다.
본론에서 시도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유명론에 대한 해석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 신학의 앞으로의 전통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가톨릭에서는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마음을 두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에 대하여서 포기한 것과 같은 느낌의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 15) 수정 플라톤주의적 입장의 유명론적 표현과 도전에 안티적 개념의 입장을 고수하겠다는 것과, 유대인의 입장을 고려한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의 합당한 영광을 말씀하시는 것을 기억할 때에는 그 실재론을 그 이름과 속성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학 전통도, 수정플라톤주의와는 달리 바르게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며, 신학의 보다 본래성을 사실적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종교개혁 신학적 입장에서 출발되어질 것으로 보인다.
각주 1) 예수와 유다의 밀약, 유다복음, 로돌프 카세르, 마빈 마이어, 그레고르 부르스트 공동번역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판YBM시사 2006.6.1. 초판1쇄, 2006.6.12. 1판2쇄
각주 2) 서론(introduction)이란 개념이 총론이란 말과 같이 쓰여질 수 있기 때문에 유다복음 읽기에 총체적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가운데서의 번역자의 서문이라고 보면, 그 본문에 세세한 측면을 다 가늠하기 보다 더 효율적이고 타당성 있는 것이다.
그 범주적 비판이라고 할 때에, 그 범주에 실재성과 실제성을 부여하는 개체가 비로소 있지 않은 한에서는 그 개체성을 모두 검토할 필요는 없다. 터툴리안이 말했듯이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알기 위해 모든 바닷물을 마셔서 확인할 필요는 없는 것과 비교할 수도 있겠다.
오히려 번역자들은 그러한 개체성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들을 서론에서 언급했는데, 그러한 것을 본 내용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각주 3) 예수와 유다의 밀약, 유다복음, pp. 3-4. p. 4.
각주 4) 상게서 p. 5.
각주 5) J. P. 모어랜드/ W. L. 크레이크, 기독교철학, 이경직 이성흠.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pp.154~161. 참고
수정 플라톤주의와 개념론자들의 대립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유명론적 개념을 배척한 가톨릭 전통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철학적으로는 화해적 개념에서 신플라톤적 개념으로 회귀적 개념을 말하기 위한 것으로 또 하나의 전통을 말할 수 있을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신플라톤적 개념이 오히려 잘못을 범했다. 즉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것 특히 자존성(aseity, a se, “스스로”)은 출애굽기 3장 14절(스스로 있는 분, I AM Who I AM)과 전혀 같을 수 없다.
이런 것을 보고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서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개혁 이후 개혁 신학자들까지도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것을 말하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서 이런 영지주의자나 신플라톤적 개념에서는 아직도 이의를 재기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 6) 예수와 유다의 밀약, 유다복음, p. 6.
각주 7) 상게서 p. 7.
"로마와 정통그리스도교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에 의해 보르헤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로마가 아니라 알렉산드리아가 승리했다면, 지금 내가 여기서 말하는 터무니없고 혼라스런 이야기는 확실하고도 당당하고 또한 극히 일상적인 이야가 되었을 것이다. " 2, 3, 4세기에 걸쳐 격렬하게 불붙었던 신학 논쟁에서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의 영지주의자들은 승리하지 못했고, 유다복음도 승리하지 못했다. 따라서 유다복음 같은 문서들의 색다른 관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생경하게 들리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헤겔철학적 입장에서 접근이 가능한데, 즉 세계와 정신에서 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 주체의 이야기로서 마치 나톨레옹의 입성과 같은 그러한 강력한 자들의 이야기가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그런 관념론적 입장에서 역사 기술은 부당하다 실존적 개념을 찾아서 말할 때에 현실적인 사상의 여지는 남겨두어야 하고 그것의 개체성에 정당성을 부여하라는 뜻을 하나의 피해의식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단들 여호와 증인이나 또는 구원파에서 나오는 쪽지에서 보면 정통이라는 개념이 이런 하나의 집단 이기적인 표현임을 의식하는 말들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각주 8) 상게서 p. 6.참고
각주 9) 클라우스 S. 크리거, 큐 복음서, 예수는 실제로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김명수 피피엔 2010, p. 21.
"그는 자신의 저서 '예수의 생애 연구사'에서, 여수 생애의 저자들은 항상 자기 자신의 세계관을 예수에게 주입 시키고 있다고 슈바처는 말한다.",
"이 슈바이처의 비판을 오늘날 많은 예수 관련 서적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책들은 예수를 무분별하게 밀교를 통달한 도사나 채식주의자 또는 여성 권익 운동가로 바꾸어 버린다."
영지주의도 이와 같은 맥락의 부정된 한 사상적 지류일 뿐이다.
각주 10) 예수와 유다의 밀약, 유다복음, p. 14.
각주 11) 곽미숙, 삼위일체론 전통과 실천적 삶, 대한기독교서회,2009. p. 33.
"삼위일체 교리가 비판을 받는 주된 원인은 삼위일체론이 1. 인간의 지적 이해와 경험에 전적으로 이반하는 비합리적인 교리로 간주되기 때문이며, 2. 성서가 ‘삼위일체’(τρίας)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용 저자의 소개와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가 비합리적이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비판받고 있는데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이미 가지고 있다면, 비합리적이어서 납득 당위성이 없다는 판단은 부당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합리성 외적인(non-rational)가운데서 합리성의 연속성을 실제적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구의 합리성과 그 비판성을 소개함에 있어서 적절하지만, 합리성의 연속성, 또한 정당성의 소재에 대해서 소개하기 보다는 현상적 소개에 그치고 있음이 아쉽다
각주 12) 도널드 K. 맥킴 교회의 역사를 바꾼 9가지 신학 논쟁 p. 29
(하나님은 누구신가(Who is God?) 교회는 자신의 신앙의 필수요소라고 여기는 것들을 명확하게 정의할 필요를 느꼈다. 그런 가장 중요한 쟁점들 가운데 바로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각주 13) 각주 5번 참조
각주 14) 알란 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와 구원, 김경진, 생명의 말씀사 1989, p. 45.
제임스 오르는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고 있는데 이는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근본 개념을 사람보다 오히려 주권적 의지로 설명함으로써 실수를 범하고 있다. 사랑이 주권에 종속되는 것이지, 주권이 사랑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주권과 사랑의 개념은 표현과 일부 상관관계를 진술 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로 인하여 2차적 진술로의 합리성은 정당한 합리성의 연속성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제임스 오르는 본문에서 인용했던 신플라톤주의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주권을 종속에 두는 잘못을 범했다.
즉 위격의 상관성이 종속도 없고 분리 개별도 아니면서도 하나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속성도 그와 같은 측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시라고 말씀하시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실존와 이름으로서의 속성인 하나님의 자존과 그에 따른 속성으로서의 주권의 실존은 사랑과 종속이란 개념은 개체에 대한 수정 플라톤적 개념의 철학적 영향력을 받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같이 언급될 수있는 것은 아니다.
각주 15) 게네스 C. 데이비스, 당신이 성경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이충호 웅진 지식하우스 2011 p. 51.
"최근 교황청 경신성사성(敬信聖事省)의 결정(2008년6월29일자)으로, 천주교에서는 더 이상 ‘야훼’를 사용할 수 없다. 이미 천주교 성경(2005) 번역부터 야훼를 ‘주’로 번역한 한국 천주교 주교의회는 2008년 10월 추계 총회를 통해 ‘야훼’의 사용금지를 결정하였고, 가톨릭 성가에 있는 ‘야훼’라는 표현도 전부 주로 수정하였다."
그러한 것의 한 예를 들 수 있는 것이 영지주의적 입장에서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는 유다복음(The Gospel of Judas)(각주1)이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그 합목적적 입장이 반 기독교적 개념이나 또는 '이단'들의 자기 합리화적 개념으로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곡해와 자기 기만적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있어서 소위 유다복음 읽기를 어떻게 하는 것이 옳으며, 또한 우리가 받을 만한 것인가에 대하여 언급하도록 하겠다.
유다복음의 주장에 대하여
먼저 번역자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입장에서 몇 가지 비판적으로 읽기를 시도할 것이다.(각주2)
첫째로, '유다의 배신과 도움에 대하여서'(각주3), 이 주제는 영지주의적 배경과 실재론에서 언급되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의 요청에 따라 배신하는 형식을 갖추었고, 또 그것은 예수님이 본향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영지주의적 개념에서 언급되어지지만 성경에서의 예수의 자기계시로서는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의 자기 계시는 성경 본문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그 실존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의 자기 실존을 가룟 유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실 수 없는 분으로 비추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대한 증거와 전혀 상관이 없으며 정당한 인식으로서의 실재와 실제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영지적(gnostic)이 용어는 고대로 부터 오늘날까지 논란' (각주4), 여기서는 고귀한 지식이 비로소 구원 즉 신의 합일되는 신플라톤적 개념의 일자로 언급되는 존재로의 회귀를 말한다고 할 때, 신론적 개념의 문제점을 의식 할 수 있다는 것이다.(각주5)
여기서 논란이라는 개념은 기득권을 가진 것으로 해석이 될 수도 있는 정통 교회 측의 입장에 상대적 여지는 남아 있다는 것으로 그 당연성을 부풀려 부인함에 대한 부당성을 알리고 소위 정통 신학이라는 것에 안티적 개념의 성공적 사실을 말하고 싶어할 수도 있고 다원적 개념성에서 자신들의 집단적 세력의 당위성을 비로소는 아니라고 해도 언급할 수 있음에 희망을 가져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신학의 집단적 이기주의의 승리적 입장을 옹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실제를 가리는 가운데서 그 지혜를 말할 때, 영지주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한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 성부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으로서 당연히 배척받고 그 실존적 당위성이 부인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셋째, 셋파(Sethians)로서의 자부심(각주6), 이는 창세기에 나타나는 셋의 자손의 지식을 가졌다고 하나, 그 셋의 하나님은 그런 신플라톤적 철학의 만들어진 신이 아니고 그 안에서 합리성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모조신(god made)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가졌다고 하는 지식도 인식 납득이나 신적 재가가 없는 합리성의 조작품에 지나지 않는 화려한 공작일 뿐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의 계보가 셋을 통해서 나타나기를 기뻐하실 때에, 그러한 지식과 지혜도 주시지만 피안적 사변의 거짓 합리성과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 신론적 입장이 다른데, 무슨 지식의 실존을 말하고 그에 따른 나름대로의 구약 성도의 자부심을 말할 수 있는지, 전혀 정신적 트라우마(trauma)가 염병으로 확산되는 것이 역겹다는 판단을 지울 수가 없다.
넷째, 보르헤스의 언급(각주7),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개념을 의식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인식에 있어서 피해의식의 소송적 개념을 정적인 방법으로 당연시 하고 싶은 소망을 피력할 뿐인 것이다.
다섯째, '대신해 죽은 구원자가 아니라 지혜와 지식을 가르치고 드러내는 스승'(각주8),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님을 임의적 자의적으로 존재 규정한 내용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영지주의자들의 변할 수 없는 입장인데, 또한 영지주의적 입장이 성경적일 수 없다는 것과 예수님의 재가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거짓 실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것은 알버트 슈바이처의 신학 이후에 예수님을 임의적 묘사하는 것이 하나의 인식의 잘못된 전통이 되었는데, (각주9) 그런 전통의 한 지류로서 영지주의도 언급되어질 수 있으며 이것은 이러한 인식의 전통이 예수님을 증거함에 있어서 그 정당성의 실존과 실체와 실제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 주장은 거짓이라는 사실적 당위성을 빗겨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은, 예수님의 자신의 존재는 스스로 주장하신다는,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성부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나타내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정당함과 본래성 절대성 등 모든 속성을 위격과 같은 형태로 스스로 갖추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가룟유다의 도움없이는 그 사역을 수행못할 것이라는 상대적 모순이 하나님의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이입한다는 것은 용서 받지 못할 죄인 것이다. 인생이 아니신 하나님이 자기 계시로서 참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은 상대적 합리성으로는 재가 받을 수 있는 또는 납득 당위성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합리성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 어리석은 지식인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 '저자들의 바램'(각주10), 번역가들의 바램은 액면적으로 건설적인 합리성의 모습을 갖추면서도 안티적 합목적성이란 것을 굳이 감추지 않거나 그것을 읽어내기를 바라는 측면에서는 또한 교회에 대한 안티적 자신 있어하는 도전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
이러한 번역가들의 자신감에는 신론의 형성에 대한 비판적 배경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각주 11) 더욱 초대 교회는 '하나님은 누구신가'가 문제가 처음 대두되었데(각주 12), 아마도 영지주의적 입장에서는 수정된 신플라톤주의적 유신론 입장과 개념학적 입장의 신학적 논쟁이 있었음을 그리고 그 지파의 신학적 전통을 의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각주 13)
그러나 초대교회가 '여호와는 하나님은 한분이시다'(신 6:3)라는 것에 힘쓰게 되었고 그 가운데서 비록 수정플라톤주의자들과 어거스틴의 대립적 입장을 볼 수 있어도 유일신을 증거하는 가운데 합당함의 전통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대상 16:29; 시 29:2; 시 96:8; 행 5:41 참조)이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의 속성을 그 상관성으로 이해하는 전통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자들(각주 14)보다는, 차라리 개념론자들의 입장을 수정하여 받을 수 있음을 정당하게 구별할 수 있을 때, 즉, 지금의 정통 신학의 계보가 구별되어질 수 있음을 기억할 때, 그 허식의 가면을 벗어야 할 것이다.
결론에 즈음해서
유다복음 읽기, 그 이해되어질 수 있는 배경에 대하여서 생각해보며 신학적 계보에 대한 성찰을 해 볼 때, 그것은 정경으로서의 실존을 말할 수 없고, 예수님을 달리 표현한다는 다양성을 말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거짓 예수를 참된 예수님으로 속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유다복음과 그 외 유사 영지주의, 또는 다른 외경이나 위경까지도 그만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의 정당함을 얻지 못한다면 여전히 안티 기독교적 개념의 실존으로 매력있게 보일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거짓이요 자기 기만이라는 것에서 회개가 아닌 다른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다.
본론에서 시도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유명론에 대한 해석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 신학의 앞으로의 전통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가톨릭에서는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마음을 두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에 대하여서 포기한 것과 같은 느낌의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 15) 수정 플라톤주의적 입장의 유명론적 표현과 도전에 안티적 개념의 입장을 고수하겠다는 것과, 유대인의 입장을 고려한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의 합당한 영광을 말씀하시는 것을 기억할 때에는 그 실재론을 그 이름과 속성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학 전통도, 수정플라톤주의와는 달리 바르게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며, 신학의 보다 본래성을 사실적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종교개혁 신학적 입장에서 출발되어질 것으로 보인다.
각주 1) 예수와 유다의 밀약, 유다복음, 로돌프 카세르, 마빈 마이어, 그레고르 부르스트 공동번역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판YBM시사 2006.6.1. 초판1쇄, 2006.6.12. 1판2쇄
각주 2) 서론(introduction)이란 개념이 총론이란 말과 같이 쓰여질 수 있기 때문에 유다복음 읽기에 총체적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가운데서의 번역자의 서문이라고 보면, 그 본문에 세세한 측면을 다 가늠하기 보다 더 효율적이고 타당성 있는 것이다.
그 범주적 비판이라고 할 때에, 그 범주에 실재성과 실제성을 부여하는 개체가 비로소 있지 않은 한에서는 그 개체성을 모두 검토할 필요는 없다. 터툴리안이 말했듯이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알기 위해 모든 바닷물을 마셔서 확인할 필요는 없는 것과 비교할 수도 있겠다.
오히려 번역자들은 그러한 개체성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들을 서론에서 언급했는데, 그러한 것을 본 내용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각주 3) 예수와 유다의 밀약, 유다복음, pp. 3-4. p. 4.
각주 4) 상게서 p. 5.
각주 5) J. P. 모어랜드/ W. L. 크레이크, 기독교철학, 이경직 이성흠.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pp.154~161. 참고
수정 플라톤주의와 개념론자들의 대립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유명론적 개념을 배척한 가톨릭 전통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철학적으로는 화해적 개념에서 신플라톤적 개념으로 회귀적 개념을 말하기 위한 것으로 또 하나의 전통을 말할 수 있을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신플라톤적 개념이 오히려 잘못을 범했다. 즉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것 특히 자존성(aseity, a se, “스스로”)은 출애굽기 3장 14절(스스로 있는 분, I AM Who I AM)과 전혀 같을 수 없다.
이런 것을 보고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서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개혁 이후 개혁 신학자들까지도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것을 말하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서 이런 영지주의자나 신플라톤적 개념에서는 아직도 이의를 재기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 6) 예수와 유다의 밀약, 유다복음, p. 6.
각주 7) 상게서 p. 7.
"로마와 정통그리스도교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에 의해 보르헤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로마가 아니라 알렉산드리아가 승리했다면, 지금 내가 여기서 말하는 터무니없고 혼라스런 이야기는 확실하고도 당당하고 또한 극히 일상적인 이야가 되었을 것이다. " 2, 3, 4세기에 걸쳐 격렬하게 불붙었던 신학 논쟁에서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의 영지주의자들은 승리하지 못했고, 유다복음도 승리하지 못했다. 따라서 유다복음 같은 문서들의 색다른 관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생경하게 들리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헤겔철학적 입장에서 접근이 가능한데, 즉 세계와 정신에서 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 주체의 이야기로서 마치 나톨레옹의 입성과 같은 그러한 강력한 자들의 이야기가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그런 관념론적 입장에서 역사 기술은 부당하다 실존적 개념을 찾아서 말할 때에 현실적인 사상의 여지는 남겨두어야 하고 그것의 개체성에 정당성을 부여하라는 뜻을 하나의 피해의식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단들 여호와 증인이나 또는 구원파에서 나오는 쪽지에서 보면 정통이라는 개념이 이런 하나의 집단 이기적인 표현임을 의식하는 말들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각주 8) 상게서 p. 6.참고
각주 9) 클라우스 S. 크리거, 큐 복음서, 예수는 실제로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김명수 피피엔 2010, p. 21.
"그는 자신의 저서 '예수의 생애 연구사'에서, 여수 생애의 저자들은 항상 자기 자신의 세계관을 예수에게 주입 시키고 있다고 슈바처는 말한다.",
"이 슈바이처의 비판을 오늘날 많은 예수 관련 서적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책들은 예수를 무분별하게 밀교를 통달한 도사나 채식주의자 또는 여성 권익 운동가로 바꾸어 버린다."
영지주의도 이와 같은 맥락의 부정된 한 사상적 지류일 뿐이다.
각주 10) 예수와 유다의 밀약, 유다복음, p. 14.
각주 11) 곽미숙, 삼위일체론 전통과 실천적 삶, 대한기독교서회,2009. p. 33.
"삼위일체 교리가 비판을 받는 주된 원인은 삼위일체론이 1. 인간의 지적 이해와 경험에 전적으로 이반하는 비합리적인 교리로 간주되기 때문이며, 2. 성서가 ‘삼위일체’(τρίας)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용 저자의 소개와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가 비합리적이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비판받고 있는데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이미 가지고 있다면, 비합리적이어서 납득 당위성이 없다는 판단은 부당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합리성 외적인(non-rational)가운데서 합리성의 연속성을 실제적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구의 합리성과 그 비판성을 소개함에 있어서 적절하지만, 합리성의 연속성, 또한 정당성의 소재에 대해서 소개하기 보다는 현상적 소개에 그치고 있음이 아쉽다
각주 12) 도널드 K. 맥킴 교회의 역사를 바꾼 9가지 신학 논쟁 p. 29
(하나님은 누구신가(Who is God?) 교회는 자신의 신앙의 필수요소라고 여기는 것들을 명확하게 정의할 필요를 느꼈다. 그런 가장 중요한 쟁점들 가운데 바로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각주 13) 각주 5번 참조
각주 14) 알란 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와 구원, 김경진, 생명의 말씀사 1989, p. 45.
제임스 오르는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고 있는데 이는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근본 개념을 사람보다 오히려 주권적 의지로 설명함으로써 실수를 범하고 있다. 사랑이 주권에 종속되는 것이지, 주권이 사랑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주권과 사랑의 개념은 표현과 일부 상관관계를 진술 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로 인하여 2차적 진술로의 합리성은 정당한 합리성의 연속성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제임스 오르는 본문에서 인용했던 신플라톤주의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주권을 종속에 두는 잘못을 범했다.
즉 위격의 상관성이 종속도 없고 분리 개별도 아니면서도 하나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속성도 그와 같은 측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시라고 말씀하시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실존와 이름으로서의 속성인 하나님의 자존과 그에 따른 속성으로서의 주권의 실존은 사랑과 종속이란 개념은 개체에 대한 수정 플라톤적 개념의 철학적 영향력을 받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같이 언급될 수있는 것은 아니다.
각주 15) 게네스 C. 데이비스, 당신이 성경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이충호 웅진 지식하우스 2011 p. 51.
"최근 교황청 경신성사성(敬信聖事省)의 결정(2008년6월29일자)으로, 천주교에서는 더 이상 ‘야훼’를 사용할 수 없다. 이미 천주교 성경(2005) 번역부터 야훼를 ‘주’로 번역한 한국 천주교 주교의회는 2008년 10월 추계 총회를 통해 ‘야훼’의 사용금지를 결정하였고, 가톨릭 성가에 있는 ‘야훼’라는 표현도 전부 주로 수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