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3:14절 해석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본문 해석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해석적 가능의 입장이 있을 수 있다.(각주1)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한 해석적 부인의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각주2) 그러나 그 본문을 읽게 되어지는 독도법에 따라서 있을 수 있는 그러한 해석들 중에서 그 자체적 해석 납득 정당함을 가지는 해석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의 자기 증거적 정당함을 따른 해석이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자존자의 자존적 자기 절대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상대적인 자기 계시적 입장에서도 자존자의 정당함에 대한 계시로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의 해석적 정당함 자체도 같이 계시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존자의 계시적 성격을 나타내는 자존자의 절대적 보편성과 재가가 부여되어진 가운데서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성경이라는 텍스트로서의 계시형태이다. 이것은 역시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성경의 자증'(Autopistia)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근거적 사실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자의 그 영광을 나타내는 계시로서 말씀이 스스로 인생들의 자존적 형상의 예배와 경배의 본능을 주장하여서 믿음으로 활자화하게 하는 역사를 통제하게 되었고 그것은 상대적인 형태이면서도 절대 자존자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재가되어 부여되어진 절대 정당함과 보편성에 따라서 합리성의 형태를 현실적으로 취하면서도 합리성의 상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게 된다.(각주3)
성경의 보편성이해
이처럼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이 납득 합당함을 핑계치 못하게 되는 가운데서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그러한 가운데서 비로소 성경의 실존에 대한 보편성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의 형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 종교라는 것과 일반 텍스트라는 것으로 볼 때에 한정되어지고 좀더 보편적인 모든 종교적 입장보다는 상대적으로 편협하다는 판단이 가능하며 가르치는 내용도 그러한 가운데서 동일한 판단이 가능하다는 합리적 당위성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의 방법을 주권적으로 절대 합당하게 선택하여서 그러한 편협한 형식속에도 자신의 절대 보편적 재가를 허락한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속성적 계시로써 자증(Autopistia)하게 되는 것이며, 증명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가운데서 모순되어보이는 것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하심의 실제를 증거하는 것으로써 나타나며 그에 따른 절대 무오의 성경과 완전영감에 대한 사실을 재가되어진 가운데 현실적으로도 실제의 진리와 사실로서 합당하게 증거되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성경의 절대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자의 재가적 보편성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비교적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를 의식해야만 하는 것으로써 자기 정당함을 찾아야 하는데, 다른 경전이나 그것에 비롯된 종교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자신들의 정체성 때문에 상대적 보편이라는 편협속에서 기만성의 정체성으로써 부정되어짐의 실존적 판단을 비로소 받게 되는 것이다.
즉, 타 모든 종교와 그에 따른 경전 자체의 정체성을 위한 합리성은 본래성을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상대적 파생적 당위성에 입각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을 위한 변명의 합리성은 자존자의 절대적 보편적 재가를 받지 않는 가운데서는 상대적 보편이라는 편협의 기만성에서 자신의 실존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믿음으로 합당하게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성경해석의 실존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안목은 실존하지 않는다. 그래도 자존의 절대자가 그러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택하신 종들의 눈을 여신다는 것은 소망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
각주1)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해석과 그 사실성과 그 납득 당위성을 재고할수 있는 것으로써의 본문을 주목하게 된다.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 145-151.
"이 모든 해석들이 가지고 있는 반론을 피할 수 있는 것은 고전적 견해이다. 이는 처음부터 내려읽으며 해석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주권이라 부르는 구원 관계에서의 하나님의 독립성 또는 자결성을 표현한다는 해석이다 이것은 출애굽기 33:19의 유비구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는다 문맥에서의 강조가 은혜스러우시겠다는 약속을 시행하셔서 은혜스러우시다는 것을 확언하는데 있다기보다도, 자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이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성에 대한 강조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고 보면 여호와란 이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외부에서 어떤 영향도 받으심이 없이 스스로 결정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상게서 p.150)
글쓴이의 부언설명 : G.보스가 '어떤 영향도 받음없이 스스로 결정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말을 한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실존까지도 포함되어진 가운데서 언급한 것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기표되어지는 동사는, 영어의 be 동사, 독일어의 sein동사와 같이 '~이다'와 '~이 있다'라는 뜻이 같이 존재하는 것과 같이, 규범과 존재를 같이 표현하고 의식하는 언어적 입장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하야동사가 쓰인 '스스로 있다'라는 개념은 그냥 나는 나인 자이다” “I am who I am”(RSV) “I am that I am”(King James)라고만 이야기 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스스로 존재하심에 대한 것도 같이 생각하게 되는 가운데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로서 주권적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읽도록 하시는 것이다.
참고 링크글
게할더스보스,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 사실규정의 정당함
각주2) 실예로는 출애굽기 3장 14절에 대한 해석중에서 '나는 나다'라는 해석이나 I am that 형식의 해석들에서 버틀란트 러셀의 기술이론에 입각한 반론이 기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의 답변으로서는 본문을 중심으로 비판한 자에 대한 글쓴이의 답변을 주목할 수 있다. 답변본문보기
각주3) 상대성과 절대성의 이해에서, 상대성은 그 자체의 보편은 본래성을 스스로 취할 수 없다.그러나 절대성은 자존자의 절대적 속성적 정당함에 따라서 그 본래성을 재가되어진 정당함속에서 그 자체적으로 스스로 취할 수 있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은 그 본래성을 절대를 의식하는 가운데서 그 실존적 정체성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기억할만한 것은 상식적으로 절대라는 개념을 임의적으로 상대적인 측면에서 예외적인 개념으로써의 개체로 이해하는 경향은 절대를 비로소 잘 보았다고, 잘 규정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상대적인 실재론에 입각한 합리성의 실존과 그에 따른 파생된 합리성의 실제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절대의 재가 있는 합리성의 실존과 합당하게 파생된 합리적 실제의 실존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말하는 것은 상대적 보편의 한정성 편협성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상식보편적 개념에서의 합리성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은 비로소 절대의 재가가 있는 합리성을 동일범주적 판단으로서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편협한 입장의 실존적 자리매김이 되어진다는 것이다. 즉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의 제반적 사실에 대하여, 주의 말씀의 합당함을 입게 되는 정당함이 설정되어지지 않는 것 외에는, 하나의 독선이라는 판단은 그 사실성을 말하기전에 이미 그 보편적 기반인 상식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편협하기 때문에 잘못 인식되어지는 판단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