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4일 일요일

하나님의 자기인식과 성경무오(infallible)에 관하여서

하나님의 자기인식과 성경무오(infallible)에 관하여서 일반적인 다른 종교에서나 철학에서는 신에 대한 불가지론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또는 자신들의 신적인 존재에 대한 정체성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모두 다 극한의 개념을 또는 어떤 최대치를 말하는 것과 같은 접근치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한다고 할 때에 열심히 도를 닦으면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현명하지 못한 관념들이라고 하는 것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의 정적인 동정표로서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내는 수준밖에는 타당성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필수적인 전제로 함에 있어서 분명한 것은 신을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 말에 대한 정당성은 상실된다고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그냥 해보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지지를 얻는다고 하는 것도 의미 없는 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서 우리 신앙인의 입장에서, 신학적인 입장에서 신에 대한 인식을 말할 때에 불가지론이 아니라 불가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따른 신지식을 가지게 되는 가운데서 우리 신앙인은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고 하는 것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적이라고 하여도 그것의 정당성은 하나님이 주신(엡2:8)것이라는 사실에서 기원이 우리의 창조주에게 있다는 것에서 얻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적인 견해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진리를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찾게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아주 보잘것없는 말이라고 하여도 진실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유념함도 중요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불가지론이 아닌 불가해성의 입장에서 볼 때에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하여서도 하나님의 자기 인식에 대한 유비로서 우리 인생이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생의 마땅한 것이며 또한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너무나 순리라고 하는 합당하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것을 인식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직관'에 따라 자신을 인식하셨음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우리 인생,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은 유비적인 지식이 형성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인식함은 하나님의 영원한 직관의 유비적 형태로서의 믿음, 그 믿음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알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내재적 성찰이 본질적인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 것을 언급해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논리적 범신론이라고 언급되어지는 헤겔의 신관은 내재적 성격을 통하여서 자신을 확정해나가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에서 자기 인식을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영지주의적 발상이 가능하여지고 사실 이러한 것은 깨달음을 말하는 동방의 이교 즉 불교에서도 접목시키고 있는 것이며 기독교 내에서도 하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이 있는 것같이 말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라고 함을 지적하겠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제한적이라고 하여도 지식을 추구하고 그것이 주안에서 신앙고백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믿음을 대신하거나 의미없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점을 언급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법이 믿음을 통하여 가능한 것이라고 할 때에 학문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회의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겠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현명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차원에서 성경무오(infallible)를 말하여야 하는데 믿음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고 할 때에 성경의 원본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감추신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원본이 완벽하다고 할 때에 그 성경으로 하나님을 지식의 범주 안에서 가두고 싶어하는 경향들 즉 믿음으로 하나님을 인식함에 있어서 방해가 되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그렇게 감추신 것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분별한 성경숭배사상을 막으시는 것으로도 언급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옛날 놋뱀(민 21:9)을 숭상하는 가운데서 요시아가 그것을 없애버렸던 것(왕하 18:4)과 같은 맥락이라고 함을 지적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성경원본에 있어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하심과 정하심을 생각한다고 할 때에 여자적 축자적 영감만을 말할 수 있는 성경의 무오(1nerrancy)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할 때에 그 성육신과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같이 성경의 주어지심이라고 하는 것도 다른 고전과 같은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비판의 여지와 핍박의 여지가운데서도 온전히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경으로서의 자신을 말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한 근거적 자료를 제시한다고 하면 헤르만 바빙크의 사상을 인용하고 있는 최갑종 교수의 입장을 고려할수 있다고 하겠습니다.(최갑종, 나사렛 예수, 기독교문서선교회 40p -바빙크에 대한 언급중 각주31 참고- ) 따라서 이러한 것을 볼 때에 우리가 말하는 성경의 무오라고 하는 것은 여자적 축자만을 고집하는 성경의 무오(1nerrancy)를 말하기 보다는 그러한 여자적인 축자가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차원을 포함하면서도 완전영감을 이야기하게 되는 성경무오(infallible)를 말하여야 할 것을 언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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