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4일 일요일

시간과 영원에 대한 언급

시간과 영원에 대한 언급 시간이라고 하는 개념과 영원이라고 하는 것의 관계성을 논함에 있어서 시간이라고 하는 것과 영원이라고 하는 개념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먼저 생각하고 난 다음에 그 관계성을 말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라고 함을 먼저 언급합니다.

시간이라는 존재를 말할 때에 성경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고 하심을 말씀하심에 따라 시간이라고 함은 하나님의 피조하신 만드신 바라고 하는 것임을 유념하게 됩니다.

이에 비하여서 영원이라고 하는 개념은 피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중에 하나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말씀드립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참된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영원을 말할 수 있고 그 영원은 하나님을 떠나서 그 기원을 말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러한 시간과 영원에 대한 것에 대하여서 이의를 제기하실 것이고 특히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피조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받지 않으려고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라고 하는 개념이 추상적이면서도 실제적인 개념으로서 그 존재의 기원을 말할 수 없다고 하면 그 이의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임의로 말하기를 자연스럽게 생겼다고 하는 말은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에서 보아도 그 개연성마저 의미를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은 종교철학에서도 많이들 언급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신적인 존재의 증명을 말하고 싶어하는 자들의 말들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데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의미를 상실한다고 할 때에 그것은 어디까지 의미를 잃고 있고 다만 개연성 속에서 또는 우리 성도들이 증명이 아니라 증거의 차원에서 말할 수는 있는데 신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는 것과 하고자 하는 그 중심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한 방식의 하나로 시간이 존재의 우연성을 말한다는 것도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취급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신존재증명이나 어떤 존재에 대한 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범주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론을 이어나간다고 할 때에 지난날 서방신학이라고 하는 것과 오늘날 토미즘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카톨릭신학에서의 시간과 영원의 개념은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의 신학사상과 또한 현대주의자들도 함께 잘못된 상관적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함을 지적하겠습니다. 그 잘못된 개념이라고 하는 것을 언급함은 창조된 피조물로서의 시간의 개념을 하나님의 속성의 개념 속에 투입하여서 내재적 성찰을 하려고 하는 그러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은 신학적, 철학적 용어를 빌린다고 할 때에 불가지론자들.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하는 자들이 신인식을 하고자 할 때에 극한의 개념으로서 영원이라고 하는 그 개념에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투입하여서 신의 속성을 내재적 성찰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철학적 단성론자들은 피할 수 없는 것들인데, 신학적인 신지식에 대하여서 불가해성을 말하고 있는 자가 아니면, 영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피조된 것으로서의 시간을 투여해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서방신학과 중세철학을 거쳐 카톨릭에서는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신을 인식을 하려고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을 언급한다고 하면 삼위일체에 대한 언급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의 위격의 구분이라고 하는 것이 유출설로 말하는 것이라고 할 때에 이것은 단성론자들은 이미 영원에 있어서 시간적인 흐름이 존재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신도 분화되어지는 존재처럼 해석하게 되며 그것은 종속론이나 질적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삼신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함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하나님안에 또는 하나님의 전속성으로서의 영원이라고 하는 개념에 시간이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그 시간을 말하는 모순과 함께 피조물과 하나님이 영원전에 있었다고 하는 식의 발상은 하나님의 정하신 섭리를 무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창조주를 피조물과 동일시하는 것으로서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성들의 장난은 그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주의 또는 개혁주의로까지 언급되어지는 자 중에 영향력이 있는 한 사람을 언급한다고 하면 칼 바르트를 언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기독교를 옹호하고 목회에 있어서 설교에 있어서 그 영향력을 위해 선하게 행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는 가운데서 오히려 본질을 왜곡하고 말았다고 함을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는 역시 새로운 현대주의 자로서 언급되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러한 자들로서 같은 범주에 속하는 자들이 앞에서 말한 현대주의자들을 말할수 있는데 이들도 카톨릭에 대하여서 비난과 그에 따른 그들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지만 이미 그들과 같은 신학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바로 시간과 영원이라고 하는 개념을 동일 범주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칼 바르트의 역사적인 상대주의적 비평을 하는 포이엘바의 비판과 비난 속에서 기독교를 옹호하려고 하는 차원에서 현실적인 실제의 역사를 넘어서고자 원역사rgeschichte)라고 하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그것은 플라톤의 이원론과 플라톤의 'Phaidros'에 나타나고 있는 광기라고 하는 개념에서 보는 플라톤사상의 회귀적인 것을 착안해서 아주 불가지론자들이 취하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역사라고 하는 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영원의 세계에서의 역사라고 하는 즉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현실적인 실제의 우리의 일상적인 삶속에 나타나는 시간과 그에 따른 분화되어지는 역사의 상대성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으로서 기독교를 옹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원역사라고 하는 개념은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하는 것에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같은 범주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으로서 그것은 진정 하나님을 피조물과 같이 두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욕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시간과 영원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다른 곳에서의 개념들로 말하고자 할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다른 곳에서 찾겠다는 것으로서 진정한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을 말할 수 없는 상대주의적인 절대주의 개념의 범부에서 인식하는 다원주의적인 경향과 함께 다른 신을 찾고 있는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음도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들도 여러 가지 신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을 인식해나가는 것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한다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내재적 성찰을 통하여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함을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저의 글 중에 하나님의 자기 인식과 믿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것을 보시면 참고가 될 것입니다.)

시간과 영원이라고 하는 개념을 볼 때에 칼바르트를 비롯한 현대주의자들과 서방신학과 카톨릭 신학은 사실 이러한 점에서 다른 길을 통한 같은 길과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 신학적인 경향을 통하여서 신교중에서 카톨릭과 이방종교들과의 화해를 말할 수 있는 분위기적인 발언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이러한 배경을 의도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자나 모르는 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분별없는 화해분위기를 언급하는 잘 정의된 정리된 거짓말쟁이들의 지식의 잠고대소리를 내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함을 유념하도록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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